개인 활동으로 탄소 줄이기는 ‘헛된 꿈’
주범은 탄소 배출 기업 (1)
“그럼 이제 우리는 뭘 해야 하죠?”
기후위기가 이끌 세상에 대해 설명하고 그 원인에 대해 알려주면 대부분의 경우 이런 질문을 한다. 기후위기가 만드는 세상은 이미 우리가 겪기 시작했다. 폭염은 길어지고 가뭄도 길어진다. 산불은 수시로 숲과 도시를 잿더미로 바꾼다. 허리케인이나 태풍은 더 많아지고 바람도 강해진다. 비가 내리면 퍼붓듯 쏟아져 토론토 같은 대도시는 물론 시골 타운들도 수시로 물에 잠긴다. 이런 재난급 폭우에 대비한 도시 설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시작이란 말이다. 앞으로 닥칠 기후 재난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전망은 오차 없이 움직이는 우주를 움직이는 물리 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달라질 리가 없듯이 우리가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하면 가혹한 기상 재난은 내일도 해가 떠오르듯 따라올 결과다. 이미 지구는 역사상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했었다.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뭘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까? 라는 질문은 당연히 머리에 떠오른다. 내가 쓰레기를 줄이면 가능할까? 내가 전기차로 바꾸면 도움이 될까? 비행기를 안타면 어떨까?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배출 안 한 만큼 지구의 대기에 쌓이는 탄소는 적어질 테니까. 아마도 홍수로 물이 차오르는 지하실에 작은 주사바늘을 담그고 물을 빼내는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인가? 겨우 그 정도라고? 그렇다면 내가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활동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안타깝지만 거의 사실이다. 어쩌면 실제는 그보다 훨씬 더 영향이 적을지도 모른다. 지구촌에서 인간의 활동을 통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메탄 등 온실기체는 매년 410억톤 근처(2022년 기준)다. 여기에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평균적인 나는 16톤을 배출하고 있다. 전지구 온실기체의 0.000 000 039 퍼센트다. 소비를 줄이고 자동차를 덜 타고 항공기 여행을 줄이는 금욕적인 생활로 절반으로 줄였다고 해보자. 얼마나 지구 전체의 탄소 배출 감소에 도움이 될 것인가. 이런 나의 결심처럼 1억명 정도가 탄소 배출을 절반으로 줄이면 의미가 있겠지만 그럴 리는 없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의미가 없다면 말이다.
문제는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에서 찾아야 한다.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너무나 제한적이다. 소비가 생산을 이끈다는 신자유주의적 사상에 따르면 이런 결과는 우리 소비자가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에너지를 사용해 난방을 했고 자동차를 타고 일터에 나갔고 집을 짓고 도로를 달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자동차는 전기차가 나오기 전까지는 배기량과 편의 시설, 제조사가 다르지만 오직 휘발유나 디젤 등 탄소를 배출하며 달리는 자동차 뿐이었다. 플라스틱 봉지에 든 식료품을 사고 일회용 컵에 든 음료를 사는데 무슨 선택이 가능한가? 적어도 탄소 배출의 측면에서는 선택권이 거의 없었다.
이런 제품을 만드는 생산자인 석유 석탄 채굴회사와 원유 정제를 하는 정유회사, 이를 통해 플라스틱을 만드는 가공회사들은 탄소 배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또 이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그럼에도 탈탄소를 위한 기술 개발이나 자원전환에 대한 투자 대신 소비자에게 책임을 넘기는 교묘한 광고와 연구지원에 몰두했다.
“당신이 선택한 자동차가, 당신이 선택한 항공기가 탄소배출의 주범” 이라는 광고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화석연료 기업들은 소비자에게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심어주고 여기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기후위기 회의론자로 만들어 내며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난을 피했다.
기후 활동가들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 비건이 되기 위해 애썼고 무더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려 노력했다. 탄소 발자국을 계산하며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데 위안을 삼았다. 바로 탄소기업들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다.
나를 포함한 기후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의 죄책감, 위선적 삶의 방식에 대한 수치심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마음대로 탄소를 배출하고 살아야 할까? (다음호에 계속)